“슬픔은 두 정원 사이에 놓인 담장이다.” -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시인이자 철학자 -

레몬인지 복숭아인지

조지 애커로프(George Akerlof)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흥미롭게도 이 사람의 노벨상 수상 논문 「레몬 시장」(The Market for ‘Lemons) 의 골자는 레몬인지 아니면 복숭아인지 구매자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내용의 논문이 어떻게 노벨 과일상도 아니고 노벨 경제학상을 받을 정도란 말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겠지만, 한번 내용을 알아보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

경제현상이 가장 활발히 꽃피는 시장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정보의 비대칭성(asymmetric Information)이다. 이 말은 시장에서 의사결정을 하기에 앞서 거래에 참여하는 상대방에 대한 지식이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또한 거래하는 사람이나 시장참여자 사이에는 가치 있는 정보를 아는 정도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경영자는 아무리 기업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한다고 해도 주주들보다 이 기업이 얼마나 잘 굴러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경영자와 주주들 사이에 정보의 비대칭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보의 비대칭성은 시장에서 두 가지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우선 역선택(adverse selection)이 발생한다. 역선택은 시장거래가 일어나기 전에 발생하는 문제로 상대방에 대한 정보의 부족으로 불리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잠재적으로 신용위험이 높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중 누가 더 적극적으로 대출을 하려고 할까? 당연히 신용위험이 높은 사람이다. 신용위험이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금이 부족하여 대출이 절실하며 더 적극적이게 된다. 만약 금융기관이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면 역선택을 할 위험이 있다. 혹은 그러한 불확실성 때문에 우량한 대출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출을 꺼리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정보의 비대칭으로 인해 발생하는 두번째 문제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이다. 도덕적 해이는 거래가 일어난 이후에 나타난다. 가령 보험 가입 전보다 가입 후에 안전에 대해 부주의해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그 예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노벨상에 빛나는 조지 애커로프의 레몬 문제에 대해 다루어보자. 여기서 말하는 레몬과 복숭아는 과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고차시장에서 형편없는 중고차를 ‘레몬’이라고 하며, 성능이 쓸 만한 중고차를 ‘복숭아’라고 한다. 두 과일의 맛을 생각해 보면 그 의미가 쉽게 다가올 것이다.

중고차시장에서 중고차를 파는 사람은 자신이 팔려는 차가 레몬인지 복숭아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중고차를 사는 사람은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중고차를 사는 사람은 가격을 책정할 때 레몬과 복숭아의 사이 어느 선에서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중고차를 파는 사람이 자신의 차가 복숭아라면 어떻게 될까? 제값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급전이 필요하지 않은 이상 팔지 않는다. 그러나 레몬이라면 어떨까? 수익이 나는 구조이므로 중고차시장에 매물로 내놓는다.

그렇다면 중고차시장은 복숭아는 거의 없는, 레몬으로 가득 찬 레몬가게가 될 것이다. 복숭아를 원하는 중고차 구입자들은 질이 떨어지는 레몬가게에 등을 돌리기 시작할 것이고, 이윽고 중고차시장은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다. 중고차시장의 레몬 문제 이야기는 중고차의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정보의 비대칭성이 어떻게 역선택을 발생시켜 문제를 야기하는지를 단순하면서도 명료하게 말해 주고 있다.

중고차시장이 아닌 주식시장이나 채권시장에서는 어떠한 레몬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까? 우량기업과 불량기업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A라고 하자.

A는 증권을 살 때 우량기업과 불량기업 사이 어딘가에 있을 평균가격을 지불하려 들 것이다. 반대로 증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어떨까? 우량기업의 증권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수지가 맞지 않아 팔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불량기업의 증권을 가진 사람은 증권시장에 매물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A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다. 한두 번은 속을지 모르지만 시장에 나온 것들이 불량기업의 증권인 줄을 알고 나면 더 이상 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장에는 불량기업의 증권만 남고 매매는 이루어지지 않아 증권시장은 제 기능을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문제의 발단인 정보의 비대칭성을 없애 주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민간을 통해 정보를 판매하게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혹은 정보의 확대를 위해 정부가 규제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증권시장의 경우 공시제도를 통해 기업의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금융중개기관도 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이들은 기업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약간의 수수료를 받고 좋은 투자처를 소개해 준다.

그러나 금융시장에서 역선택을 방지하기 위한 가장 대표적인 해결책 중 하나는 바로 신용평가회사를 통하는 것이다. 이번 장에서 우리가 깊게 알아봐야 할 대상이다. 이들이 과연 정보의 비대칭성이라는 문제를 풀어주는 해결사인지 아니면 또 하나의 문젯거리인지 말이다.

앞서 정보의 비대칭으로 인한 도덕적 해이는 거래 이후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했다. 도덕적 해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이다. 주식회사의 경우 요즘은 전문경영인을 두고 있어서 회사의 소유주와 경영자가 분리되어 있다. 한마디로 주인과 대리인의 관계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면 경영자는 주주를 위해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기보다 자신의 이득을 더 챙기려 드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다. 한 예로 미국의 엔론과 타이코 인터내셔널 같은 기업의 경영자들이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서 회사 자금 및 이윤을 유용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주주들이 기업에 대한 정보가 불충분할 경우 대리인들이 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채무관계는 어떨까? A라는 사람이 B에게 1억원을 빌리고 이자 10%를 준다는 채무계약을 맺었다고 하자. 그런데 B는 A를 소개받아서 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 A는 그 돈으로 자기 동네에 구멍가게를 하나 차릴 거라고 했다. B는 A가 사는 동네에 구멍가게가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수익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A는 심각한 도박중독자여서 수중에 돈이 들어오자 도박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도박장으로 향했다. 정보의 비대칭으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 것이다.

정보의 비대칭으로 인한 도덕적 해이를 불러오는 주인-대리인 문제는 기업 약관이나 회계감사를 통해 경영자를 감시하는 장치를 마련하고 감사를 받도록 하면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채무관계일 경우에는 담보를 잡아서 빌린 돈을 갚지 않으면 그 담보로 채무를 변제하는 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이나 정부당국이 법률을 통해 규제하거나 엄격한 감시 및 감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힘 있는 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막기는커녕 부추기는 경제정책들이 남발되고 있어서 그들과 우리가 가진 정보의 간극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그린스펀 풋’과 ‘버냉키 풋’인데, 이번 장 말미에 깊게 살펴볼 것이다.

중고차 중개시장이나 금융기관, 정부의 규제와 회계감사 그리고 채무관계 등 현재 우리가 실생활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들은 정보의 비대칭에 의한 두 가지 문제, 즉 역선택과 도덕적 해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런데 이런 기능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시장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레몬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미 재계 7위였던 잘나가던 회사 엔론이 분식회계를 하고 이를 당시 최고의 회계회사였던 아서 앤더슨이 도와주는 사건이 터졌다. 엔론 사태가 터지자 증시가 급락하고 금리가 올랐다. 세계 4대 투자회사인 리먼브라더스가 담보로 잡은 자산들은 죄다 부실자산이었다. 이들 채권에 AAA라는 최고 신용등급을 주었던 신용평가회사들은 그 유명한 S&P와 무디스였다. 그때까지 증권시장의 공시는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들이 발생하면 불확실성이 고조되면서 정보의 비대칭성이 증대된다. 도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우리가 보는 정보는 정확한 것인가? 역선택과 도덕적 해이 문제가 증폭되면 금융을 흐르는 혈관이 마비되며 신용경색이 일어난다. 그리고 금융위기가 발생한다. 금융위기는 그 위기 자체로 다시 불확실성을 증대시켜 시장참여자들을 서로 믿지 못하게 만들고 그 결과 자금의 순환이 극도로 위축된다. 실물로 가는 혈관이 막히면서 실물위기로 전이된다.

금융시장이 발달하고 더 많은 돈이 투입될수록 정보에 대한 욕구는 강해지고 여러 가지 장치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고도화될수록 서로의 연결고리가 복잡해져 도미노처럼 작은 일로도 일거에 무너지기 쉽다. 하등동물은 몸이 두 동강이 나도 살아남기도 하지만 고등동물은 손가락만 다쳐도 온몸이 아프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레몬 문제는 단순한 이야기지만 현재의 시장 메커니즘과 금융중개기관, 더 나아가 금융위기와 경제위기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정보를 쥐고 있는 주체는 서민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대형은행과 대기업들은 대마불사 (大馬不死, too big to fail)라고 하여 죽을병에 걸려도 결코 정부가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지금의 제도는 기업과 기관들의 역선택을 최대한 막아주며, 그들의 도덕적 해이는 널리 용인해 주고 있다.

이것이 레몬맛만큼이나 씁쓸하고 시린 이 시대의 현실이다.

신용평가회사, 메피스토와 파우스트의 계약

“우리는 수입을 올리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

2008년 10월 22일 블룸버그 통신에 경악스러운 뉴스 하나가 떴다. 이번 금융위기를 몰고 온 주범 중 하나로 신용평가회사가 지적되는 가운데 무디스의 한 직원이 주택담보증권 상품에 미심쩍은 등급을 매긴 후 임원에게 이런 이메일을 보낸 것이다. 우리는 이익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말 이다.

‘신용’이라는 말은 금융거래에서 채무자가 약정된 기간 안에 정해진 원리금을 갚을 수 있는 의사와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대출을 원하는 주체는 개인, 기업, 금융기관 심지어 국가까지 매우 다양하다. 신용을 공여하는 입장에서는 대출을 원하는 대상에 대한 모든 신용정보를 알 길이 요원하다. 그래서 신용을 전문적으로 평가하는 신용평가회사가 등장한 것이다.

신용평가회사가 설립된 후 모든 금융기관들은 이들의 정보를 기반으로 대출 여부뿐만 아니라 금리와 상환기간 등 다양한 설계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신용평가회사의 신용등급 평가의 중요성과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졌다. 이는 곧 권력의 증대를 의미하며 동시에 엄정한 공정성과 탁월한 전문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흡사 경제체제 안의 대법관과 같은 위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계 3대 신용평가회사는 미국의 무디스 Moody’s 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 S&P , 프랑스계의 피치 Fitch IBCA 이다. 최초의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는 1900년 존 무디 John Moody 에 의해 설립되었다. 무디스는 1909년에 미국 최초로 200여개 철도채권의 신용등급을 발표하면서 미국 굴지의 신용평가회사로 부상했고, 현재 국가·은행·채권·어음 등 다양한 분야의 신용등급을 발표하고 있다. 여기서 국가 신용등급이란 실제로는 정부 발행 외화표시 장기채권의 신용등급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외평채가 좋은 예이다. 무디스가 국가 신용등급을 정할 때는 경제변수 외에도 정부규제, 정치상황, 사회·문화적 요인 등을 폭넓게 활용하고 있다.

무디스의 뒤를 이어 Poor’s사(1916년)와 Standard Statistics사(1924년)가 각각 회사채 신용평가를 시작했다가 1914년 둘이 합병하여 오늘날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 S&P 가 되었다. S&P는 세계 60여개 국가를 대상으로 정치상황, 경제구조, 경제성장 전망, 재정운용, 공공부채, 대외부채, 물가, 부채상환 능력 등 8개 부문 31개 항목에 걸친 투자환경을 조사해 신용등급을 발표하고 있다.

프랑스계 회사인 피치는 650여개의 비미국계 금융기관 및 50여개국의 신용도 평가로 유명한 IBCA사와 재정평가 등으로 잘 알려진 피치사가 1997년 합병한 것이다.

이 3개의 신용평가회사는 전세계 신용평가 시장을 완벽하게 틀어쥐고 있다. 즉 신용평가 시장은 과점시장이다. 이들의 미국시장 점유율은 95%에 이르고 있으며 유럽시장도 완전히 장악한 상태이다.

우리는 이들 신용평가회사들의 한마디가 한 국가의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나라도 2008년에 국내 은행에 대한 신용등급이 조정되거나 조정 경고를 받으면서 관련 은행들의 CDS(신용부도스왑) 프리미엄이 급등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로 이들이 매기는 신용등급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문제가 되었던 주택관련 금융상품 대부분이 무디스와 S&P에 의해 최고 등급인 AAA를 받았던 것이다. 2007년 4월 미국 하원이 입수한 S&P 관계자들의 이메일 내용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그 평가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어.”

“알아, 평가모델이 위험의 절반도 반영하지 못했어. 신용등급을 부여하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평가해야 하고 ‘소’가 만든 상품이라도 우리는 등급을 매겨야 돼.”

이러니 우리가 ‘소’가(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공정성에 가려진 진실이다. 신용평가회사는 민간회사이며 이들의 최대 목표는 이익 극대화이다. 그런데 이들의 이익은 대부분 이들이 평가하는 회사로부터 나온다. 공정성과 수익성의 양자택일에서 이들은 늘 고민할 수밖에 없으며 자본주의체제의 기업 입장에서 봤을 때 그 무게중심이 이윤에 더 가깝게 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리고 이번 금융위기가 이를 증명했다.

또 다른 문제는 신용평가회사의 내부 평가과정을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비공개는 늘 조작과 부패의 온상이 된다. 『 워싱턴포스트 』 에 의하면 신용평가회사 내부에 평가위원회가 있다고 하지만 평가의 80%가 수석분석가의 입김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며, 심지어 발표시한을 불과 수분 혹은 수초 앞두고 급조된 신용평가 사례도 있다고 한다. 이런 발표에 의해 기업이, 은행이, 심지어 한 국가가 무너질 수도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신용평가회사들이 월가의 큰손들과 얽히고설킨 관계라는 점이다. 무디스 이사진의 대부분이 그들이 신용을 평가하는 고객기업의 임원을 겸하고 있다. 헨리 매키넬 무디스 이사는 2005년 당시 신용등급 최상위인 화이자와 엑슨모빌의 회장과 이사를 겸직하고 있었다.

현재 오바마 정부에도 과거 월가의 영웅들이 경제관료 진영에 대거 포진해 있는 것을 볼 때 백악관, FRB, 월가, 신용평가회사 등 4각 편대의 추잡한 위용은 여전한 상태이다. 물론 이번에 무디스가 법정에 서고 신용평가회사의 감시·감독체계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지만, 현재의 위기국면을 모면코자 하는 대국민 립서비스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신용평가회사는 어떨까? 이 또한 문제점이 많기는 마찬가지이다. 2003년 카드채 사태 당시 LG카드 등 카드회사의 연체율이 치솟았지만 신용평가회사들은 이들의 신용등급을 제때 조정하지 못했다. 당시 신용평가회사들은 카드사의 신용등급을 AA(양호)에서 다소 약화된 AA-로 조정하는 데 그쳤다. 이후 LG카드의 연체대금 액수가 커서 부도위기가 왔을 때에야 비로소 신용등급을 일제히 내려 비판을 받았다.

같은 해 SK글로벌 현 SK네트워크 이 1조 6,000억원의 분식회계를 저질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분식회계 사실이 적발되어 10조원 가량의 부채규모가 드러나자 SK 계열사 모두가 흔들리는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신용평가회사들은 그들의 부채규모가 드러나 증시가 흔들릴 때까지 신용등급에 손을 대지 않았다.

최근에도 이런 문제는 계속되었다. 2010년에 대한해운이 신용평가회사로부터 투자적격 등급을 받은 지 두 달 만에 법원에 기업회생 절차를 신청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고, 2011년에는 진흥기업이 워크아웃을 신청했지만 이 회사의 신용등급은 A3로 투자적격이었다.

신용평가회사는 우리에게 정확한 정보를 공개해 정보의 비대칭을 줄여주어야 하지만 여전히 제 역할을 못하고 있음이 이번 금융위기에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러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과연 우리는 어디서 가치 있는, 그리고 진실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신용평가회사의 많은 분들이 공정성과 전문성을 온전히 사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용평가회사가 경제를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권력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존립목적과 형태 그리고 지배구조에 대한 근본적이고 끊임없는 성찰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 없이 파우스트가 메피스토와 맺은 언약을 파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며 이익을 위해 영혼을 팔았다는 고해성사는 앞으로도 여전히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정보의 비대칭성은 심화될 것이다.

메피스토 : 난 그대의 동반자가 되어 그대에게 봉사하겠소. 그대가 바란다면 그대를 구할 것이고, 그대가 바라는 건 모두 이루어줄 것이오. 단 그게 모두 이루어지면 지옥에서는 반대로 나에게 봉사해야만 하오.

파우스트 : 지옥 따윈 별거 아니야. 뻔하지 뭐. 좋다. 네가 내게 평온과 이 세계의 모든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면, 난 이렇게 말하겠다. 시간이여 멈춰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그럼 난 죽음으로 지옥의 너에게 봉사하겠노라. 계약을 하자.

그린스펀과 버냉키의 ‘풋풋’한 사랑

“앞으로 몇년 동안 실업률을 예측하는 간단한 모형이 여기에 있다. 그린스펀이 원하는 실업률에 그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영한 오차를 더하고 빼면 된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고 금융위기 이후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지난 1997년에 한 잡지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결국 미국 경제가 그린스펀이 원하는 대로 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물론 이번 금융위기로 그린스펀의 신화는 막을 내렸지만 그의 유산은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다. 바로 ‘그린스펀 풋’이 그것이다.

미국 FRB의 아홉번째 의장으로 1951년부터 1970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재직한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William MacChesney Martin)은 FRB의 역할에 관한 표준적인 정의를 정립한 사람이다. 그는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중앙은행이 할 일은 파티가 막 시작될 때 펀치볼 punch bowl 을 가져가 버리는 일이다.”

펀치볼은 술·설탕·우유·레몬·향료를 넣어 만든 음료인 펀치를 담는 잔을 말하는데, 펀치를 음료로 내놓는 사교파티를 뜻하기도 한다. 마틴의 말을 풀이해 보면 중앙은행은 경제가 확장이라는 거대한 파티를 시작하려고 할 때 선제적으로 파티의 흥을 깨는 긴축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린스펀은 파티가 깨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파티의 흥이 깨질 위기가 닥칠 때마다 과감한 기준금리 인하와 구제금융으로 파티의 흥겨움을 지속하려고 노력했다.

그린스펀이 취임한 지 불과 2달 만인 1987년 10월, 주가가 대폭락하는 블랙 먼데이가 발생했다. 당시 대형은행들이 곤란을 겪고 있었고 모두 신용위기가 곧 현실화될 거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그린스펀은 기준금리를 6주 동안 3회나 인하하며 공격적인 확장정책을 실시했고 증시는 다시 반등했다.

1998년에는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함에 따라 헤지펀드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 LTCM 가 붕괴되는 등 최악의 상황이 다가왔다. 그러자 그린스펀은 7주 동안 기준금리를 3회나 인하했을 뿐 아니라 LTCM에 자금을 지원하도록 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LTCM은 공공기업이 아니라 이익을 위해 엄청난 빚을 등에 업고 투기를 자행했던 헤지펀드일 뿐이다.

하지만 그린스펀은 20개 주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으로 하여금 36억 5,000만 달러를 지원하도록 유도해 LTCM의 인수와 구조조정 재원으로 충당하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LTCM이 2000년에 청산될 즈음에 은행들은 그리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투자자금을 일부 회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린스펀의 철학은 9·11사태를 맞이하면서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9·11사태 이전에 이미 미국의 기준금리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낮은 3.5% 수준에 있었다. 그럼에도 9·11사태가 발생해 파티가 막을 내리려 하자 그는 기준금리를 4회에 걸쳐 연말까지 1.75%로 신속하게 인하하고 2002년 내내 그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2002년 11월 경제가 급격히 악화되려는 조짐이 보이자 다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하해 1.25%로 떨어뜨리고, 2003년 2분기에는 1954년 이후 최저수준인 1.0%까지 인하했다.

다음 분기 미국은 연 7.5%라는 경이적인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2003년 남은 기간과 2004년 내내 미국이라는 큰 선진국이 3% 중반대라는 상당히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게 된다.

이후 무리수를 연발한 그린스펀의 파티는 파생상품과 더불어 거대한 주택버블을 만들었고, 2008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불황을 야기했으며, 그의 신화는 무참히 사라지게 된다.

2000년대 초 월스트리트는 이러한 그린스펀의 행위를 ‘그린스펀 풋’이라 명명했다. 풋은 풋옵션 put option 을 뜻하는데, 풋옵션은 자산가격이 떨어질 때 손실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커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계약으로 일종의 보험과 같은 성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쉽다.

그린스펀이 FRB 의장으로 있던 시절 투자자들은 위기가 닥치면 으레 그린스펀이 기준금리를 인하하여 구제해 줄 것이라는 이상한 ‘신뢰’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린스펀에 대한 신뢰가 깊어질수록 투자자들은 더욱 무모한 리스크를 껴안고 탐욕의 파티를 계속 즐겼다. 다시 말해 그린스펀 풋은 정보 비대칭성의 두번째 문제인 도덕적 해이를 양산한 것이다.

그린스펀의 뒤를 이어 2005년 10월에 FRB 의장이 된 벤 버냉키는 취임 초기 그린스펀 때문에 많은 곤욕을 치렀다. 당시만 해도 그린스펀은 여전히 월가에서 신화적 인물로 추앙받고 있었다. 버냉키는 그린스펀과 비교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린스펀 풋이라는 유산을 잘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는 월가의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월가에서는 그린스펀 풋과 대비되는 말로 ‘버냉키 콜’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여기서 콜이란 버냉키의 잦은 말바꿈으로 시장이 요동을 치면 옵션 보유자를 보호하지 못해 만기 이전이라도 권리행사를 촉진시키는 콜옵션 call option 을 의미한다. 즉 버냉키 콜이 발생하면 설령 증시상황이 좋더라도 매물이 쏟아져 증시가 조정국면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월가와 언론은 버냉키를 한참 오해하고 있었다. 버냉키의 원래 별명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면 그런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버냉키의 별명은 ‘헬리콥터 벤’이었고, 이 별명이 함의하는 바는 ‘버냉키 콜’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미국의 통화주의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은『 최적 통화량 』 에서 헬기로 돈을 뿌리는 정책이 어떤 효과를 낼지에 대해 추론했다. 이 발상은 극심한 디플레이션이 일어나 기준금리를 낮추어도 돈이 돌지 않는 ‘유동성 함정’이 발생했을 때를 가정하고,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중앙은행이 은행을 거치지 않고 기업과 소비자에게 직접 돈을 뿌려야 한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공황연구의 대가인 벤 버냉키는 2002년 말 디플레이션에 대한 강의에서 프리드먼의 이 헬기를 인용한 것으로 유명해졌고 이때 버냉키는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즉 문제가 발생하면 헬기에서 돈을 뿌려버리겠다는 굳은 의지를 이미 표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 금융위기가 터지자 그는 그린스펀 풋이라는 유산을 이은 적자 嫡子 일 뿐만 아니라 이를 계승발전시킬 적임자 適任者 임을 세상에 증명해 보였다.

벤 버냉키는 2007년 서브프라임 사태가 발생하자 금융기관에 돈을 뿌리기 위해 5개 유동성 프로그램 TAF, TSLF, PDCF, TALF, TARP 을 급격히 가동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금융안정화계획을 발표하여 탐욕으로 쓰러져 가던 은행들과 기업들에 돈을 수혈하도록 했다.

물론 리먼브라더스는 파산했지만 버냉키는 대형은행 대부분을 납세자의 돈으로 살려주었으며, 글로벌 보험회사인 AIG를 국유화하는 등 사회주의국가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기준금리를 제로금리까지 끌어내렸으며 더 이상 금리인하 수단을 활용할 수 없게 되자, 양적완화 정책을 통해 금융기관에 엄청난 유동성을 퍼부으며 이른바 ‘버냉키 풋’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지를 웅변했다.

역시 그 결과는 곧 도덕적 해이로 이어졌다. 국민의 세금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대형은행들은 금융위기가 1년도 지나지 않은 2009년 40조원에 달하는 보너스 잔치를 벌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러한 은행들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말의 성찬이었을 뿐 구체적인 행동으로 귀결되지 않았고, 2011년 현재 친은행, 친기업의 이미지로 돌아서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린스펀과 버냉키의 이러한 ‘풋풋’한 은행과 기업에 대한 사랑(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은 정보의 비대칭을 증대시키는 도덕적 해이를 용인해 왔으며, 우리들은 이러한 상황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가치 있는 정보를 독점하고 왜곡된 정보를 내보내며, 때로는 정보 그 자체를 자신의 임의대로 만드는 그들 앞에는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큰 담장이 놓여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해야 할 신용평가회사와 왜곡된 정보를 차단하고 그릇된 정보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할 규제당국은 오히려 그 담장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놓인 슬픈 담장 앞에 서서 우리는 Intelligence가 설사 경제의 흐름을 알게 해주는 힌트라 할지라도 그것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이 거의 없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늘 다양하고 좋은 정보를 제공해 주는 언론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결국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최고의 정보제공자인 언론을 믿을 수밖에 없다. 언론을 통해 담장 너머에서 우리를 상어처럼 위협하는 그들의 정보력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언론이 상어에 대한 Intelligence를 제공할 때 말이다.